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대연각호텔 화재 (문단 편집) == 개요 ==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u0Fs2vlvg1A)]}}}|| || [[대한뉴스]]의 영상으로 55초쯤에 '''실제로 추락하는 사람이 찍혔으니 시청에 주의할 것''' || [[1971년]] [[12월 25일]]에 [[서울특별시]] [[중구(서울)|중구]] 충무로동의 '대연각(大然閣) 호텔'[* 운영법인은 극동그룹 계열 (주)대연각호텔(현 고려통상)이었으며 당시 해당 건물은 호텔 겸 오피스텔이기에 [[SK|선경그룹]], [[GS칼텍스|호남정유]], [[극동건설]] 등도 입주했다.]에서 발생한 '''[[대한민국]] 최악의 [[화재]] 사고.''' 세계 최대의 화재 사고들 중 하나이며 [[호텔]] 화재 중에서는 단연 최대 사고. '''총 사망자 166명[* 외국인은 16명으로 일본 10명, 대만(자유중국) 2명, 미국/인도/튀르키예 등지 1명씩][* 실종된 사람까지 집계하면 총 191명이 나온다.](추락사 38명)''', 부상자 68명, 실종 25명이 나왔다. ||[[파일:20231009_155220.jpg]]|| 사건 당일은 [[성탄절]]이었기 때문에 호텔에 수많은 인파가 몰려 있었던 상태라 엄청난 사망자가 발생했다. 사건에 휘말린 인물들 중에는 주한 [[중화민국|대만]] 대사관 위셴룽(余先榮) 공사[* 1907년 [[청나라]] [[후난성]] [[창사시]]에서 태어났다. 난징 국립중앙대학(현 난징대학/대만 국립중앙대학)과 미국 캘리포니아 대학교 대학원을 졸업하여 1934년 [[샌프란시스코]] 주재 부영사로 외교관 커리어를 시작했다. 이후 휴스턴과 시카고 총영사, 아이티 대사대리 등을 거쳐 1970년 7월 주한 대만 대사관의 차석인 공사로 부임했다. 대만 정부에선 '미국통'으로 알려졌으며 평소 자상하고 깔끔했다고 한다. 1971년 당시는 한중수교 이전이었고 [[중국]]이 '중공'으로, 대만이 '[[자유중국]]'으로 불렸으며 중화권의 고유명사는 한국 한자음으로 불렀기에 '여선영 중국공사'로 불렸다.([[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71122700329207016&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71-12-27&officeId=00032&pageNo=7&printNo=8074&publishType=00020|경향신문 기사]], [[https://news.joins.com/article/1310637|중앙일보 기사]])] 같은 귀빈도 있었다. [[http://article.joins.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1310210|#1]], [[http://blog.naver.com/ksmbingo/60066518624|#2]] 11층에 묵고 있던 공사는 10시간 만에 구조되었고 그를 구조한 소방 대원들은 전원 1계급 특진했지만 안타깝게도 공사는 화재 당시 호흡기에 중화상을 입어 투병 끝에 1972년 1월 4일 사망하였다. [[주한튀르키예대사관]] 무관 파질 유즈바시오글루 대령도 화재로 그 자리에서 숨졌다.[* 이 둘은 사후 1972년에 수교훈장 흥인장과 보국훈장 청수장을 각각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72010800099207014&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72-01-08&officeId=00009&pageNo=7&printNo=1796&publishType=00020|추서받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